CRITICAL ESSAY 01
소리 이전의 소리
-김종건의 과 그 이후 <꽃:맺음>의 성격에 대하여
- 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전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소리그림
그림은 대상재현에서부터 대상의 부재까지 무한대의 물物을 문제 삼고 있다. 현이 있는 거문고를 듣는 것과 현이 없는 거문고를 듣는 것과 같다. 전자가 구상이라면 후자는 추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자는 소리라는 대상을 추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 점에서 소리와 그림은 한 몸이자 불이不二의 관계다. 굉음轟音을 내며 내달리고 있는 방배역 네거리 자동차는 시청각이 동시에 포착한다. 하지만 스타벅스 창문을 뚫고 보이는 버스 자가용 택시는 소리가 무시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담장 너머 달리는 차는 소리로만 인식된다. 요컨대 차가 움직인다는 것은, 차가 살아 있다는 것은, 눈에 소리가 들릴 때, 심지어는 소리가 완전히 지워졌을 때라도 온전히 지각된다. 시각언어는 청각언어의 그림자다. 이런 맥락에서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림을 보는 일이 된다. 임윤찬이 연주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12마당은 천지자연의 변화무쌍한 기운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낸 것이다. 질풍노도(4번 마제파)인가 하면 이내 화풍진진花風陣陣으로 백만대군과 같은 꽃바람으로 몰려왔고(5번 도깨비불), 또 먹구름에다 북풍한설(12번 눈보라)이 몰아쳤다. 장대비로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리는가 하면 곧바로 광풍제월과 같이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7번 영웅)로 돌변하였고, 적멸의 고요(9번 회상)에서 피어나는 그의 미소는 선열법희禪悅法喜 그 자체다. <정음正音>에서 천지자연의 소리[聲]가 있으면 천지자연의 그림[文]이 있다고 한 그대로이다. 결국 그림과 소리는 불이의 관계다. 그래서 문자文字발명이야 말로 텍스트인 말의 세계를 직접 눈에 보이게 써내게 한 언어의 혁명중의 혁명이다. 즉 문자는 청각언어를 시각언어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노래, 춤, 그림, 말과 같은 언어 중에서 벼리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상형象形원리, 역리易理, 자방고전字倣古篆원리로 발명된 ‘정음正音’은 상형, 표음, 표의라는 문자의 성질은 물론 자질資質까지 다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문자중의 문자가 정음이 된다. 요컨대 그림과 소리/말의 세계를 동시에 일체로 문제 삼는 것이 문자다. 문자/글자를 쓰는 행위, 즉 서書를 필획筆劃하는 과정을 문제 삼으면 당연히 가무歌舞까지 일체로 놀아난다. 서書라는 언어가 모든 예술의 토대이자 궁극인 이유다.
온몸쓰기
김종건의
이번의 <꽃:맺음>은 김종건의 초시간의 결정이다. 추상회화보다 이번에는 한글을 가지고, 그것도 한 글자를 해체解體해서 다시 추상으로 돌려낸 것이다. ‘틈’, ‘숲’, ‘산’ 과 같은 글자를 다시 해체하고 그 이전의 추상으로 돌려낸 것이라는 점에서 추상 이전의 추상이다. 그것도 온몸쓰기에다 제주도의 소리 냄새까지 아주 몹시 물씬 풍겨난다.
‘ㄱ’의 순간
그렇다면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 김종건의
요컨대 ‘ㄱ’이 그냥 ‘꽃’이라는 글자/단어를 형성하는 부속품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늘 상 있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하면 늘 상 있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고 언어이전의 세계를 노래한 사람은 노자다. 하지만 ‘도’도 ‘명’도 이런 언어가 아니면 드러낼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이다(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라 했듯 삼라만상은 언어로 이름하고 써 낼 때 비로소 태어난다. 언어는 실상을 드러내는 방편이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래서 선문禪門에서는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 하지 않는가. 문자가 없으면 실상을 설명 할 도리가 없다. 인간이 한 획劃을 긋고, ‘ㄱ’이라고 ‘씀’으로서 / ‘그림’으로서 / 언어 해냄으로서 세계의 실상은 그 모습을 비로소 드러낸다. 김종건의 , <꽃:맺음>은 말과 문자, 그림과 소리세계가 중첩되면서 문자이전의 문자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본대로 ‘틈’, ‘숲’ ,‘산’과 같은 글자를 다시 해체하고 그 이전의 추상으로 돌려냈다. 여기서 문자와 그림의 경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앞서 ‘검은 피’라고 명명했지만 김종건의 에서 주목되는 것은 혼합물질(Mixed media)의 주종이 되는 먹이다. 먹이라는 물질은 회사繪事이자 화면의 표면으로서 ‘꽃’이다. 더구나 이번의 <꽃:맺음>에서 작가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다른 물질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온 캔버스천이 아니라 코트 위에 검정색 무성 페인트와 산화철을 섞었다.”
이 지점에서는 글자와 물질까지 전복시켜 내고 있다. 그림을 뒤집어보면 시종일관 후소後素로서 작품의 근본바탕이 됨은 물론 <꽃:맺음>에 가서는 회사와 후소가 흑과 백, 불랙과 화이트로 대반전된다. 이 지점에서 물질덩어리인 먹과 페인트는 붓이 된 온몸으로 일체가 되면서 살아있는 정신의 고갱이로 치환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기계시대 버전이 따로 없다. 특히 작가의 몸을 통해 정지停止한 것보다 더 서서히 필획筆劃되면서 먹은 비로소 신神 기氣 골骨육肉 혈血이 일체가 되어 생생활활하게 숨 쉰다. 생명 탄생의 현장이 김종건의 , <꽃:맺음>이다. 이러한 획면劃面의 느리기 그지없는 운필은 김종건의 와 연작에서 보듯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칼질로 바탕을 긁어내거나 골필骨筆의 붓질로 화면을 추획사錐劃沙로 질삽疾澁하게 그어내는 것과는 정반대다. 더 나아가서는 오토마티즘에 기반 한 액션페인팅이나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 같고도 다르게 김종건이 물감을 마구 뿌리기까지 하고 있는 지점과 좋은 대비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 <꽃:맺음>의 시작인 ‘ㄱ’은 만물의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된다. 필획筆劃 행위 그 자체가 137억 년 전 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우주만물의 탄생지점을 탐사하고, 인간의 무의식無意識 세계를 그려내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체體와 용用
그 소리 또한 너무 커서 아예 들리지 않는다.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빅뱅의 순간처럼, 장강長江이나 심해深海의 거대한 흐름처럼 천지자연의 소리가 너무 커서 인간의 감각과 인식세계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비로소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바로 대음희성大音希聲이고, 적멸寂滅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 <꽃:맺음>의 꽃은 그림이전에 소리다. ‘ㄱ’으로 타고 들어가 ‘ㄲ’, ‘ㅗ’, ‘ㅊ’로 노래하는 무현금無絃琴의 춤이다. 여기서 화담 서경덕의 <무현금명無絃琴銘>을 들어보자.
琴而無絃 存體去用 거문고 줄 없음은 본체는 두고 작용을 없앤 것이지만
非誠去用 靜基含動 작용을 진정 없앤 것이 아님은 고요 속에 움직임을 함유한 까닭이다.
聽之聲上 不若聽之於無聲 소리로 듣는 것은 무성으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形上 不若樂之於無形 형태로 즐기는 것은 무형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形 乃得其徼 무형에서 그것을 즐기므로 이내 그 아득함을 얻고,
聽之於無聲 乃得其妙 무성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그 미묘함을 체득한다.
外得於有 內會於無 밖은 유에서 얻지만 안은 무에서 모인다.
顧得趣乎其中 奚有事於絃上工夫 생각하면 흥취란 그 가운데 있거늘 어찌 줄타기만 일삼는가.
不用其絃 用其絃絃 그 줄을 쓰지 않고 그 줄의 줄을 쓴다.
律外官商 吾得其天 음율 밖의 가락을 다스려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한다.
樂之以音 樂其音音 소리로 그것을 즐기고 그 소리의 소리를 즐기지만,
非聽之以耳 聽之以心 귀로 그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것을 듣는다.
彼哉子期 曷耳吾琴 그것이 그대의 잣대이거늘 내 어찌 거문고를 귀로 들으리?
요컨대 화담의 거문고나 김종건의 , <꽃:맺음>은 500여 년의 시공을 접고 소리는 물론 춤도 형상도 마음으로 듣고 보는 것으로 통하고 있다. 밖으로는 소리와 형상을 감각하지만 안으로는 소리로 소리를, 형상으로 형상을 초월해내는 것이다. 소리를 들을 수도, 형상을 볼 수도 없는 대음大音과 대기大器의 자각도 바로 이 지점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소리, 자연의 형상을 듣고 보는 지경이다.
소리 없는 소리
그렇다면 이제는 김종건의 을 다시 해체하여 문자로 재구성 하면서 마무리를 지어보자. <꽃:맺음>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정음正音의 구조대로 당연히 초성‘ㄲ’ 중성‘ㅗ’ 종성‘ㅊ’으로 구축된 견고한 3층탑이다.
ㄲ
ㅗ
ㅊ
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 <꽃:맺음>이 제주 돌담으로 다가온다. 억만년 돌덩이들의 스크럼이 그믐밤 바다 같은 현지우현의 ‘검은 피’로 필획筆劃되면서 요지부동搖之不動으로 서 있다. 남명 조식이 지리산을 두고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天鳴猶不鳴”고 노래한 대로 , <꽃:맺음>은 제주바다가 울어도 한라산이 울어도 소리하지 않는다. 천지가 시작되고 만물이 태어나는 여명의 적막세계가 바로 여기다. 그래서 이것은 차라리 춤이다, 노래다, 글씨다, 그림이라고 구분지어 명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억겁의 한라산 바람소리와 애월의 파도소리에다 산광수색山光水色이 층층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래서 감각感覺너머 공空의 세계와도 허정虛靜의 세계와도 통한다. 여기에 대해 다시 김종건의 작품 <반야심경>은 이렇게 설한다.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도 없고,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苦 집集 멸滅 도道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그래서 김종건의 , <꽃:맺음> 앞에 서면 미추美醜도, 잘 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이 모든 분별심分別心을 여지없이 다 뭉개버리면서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욕심慾心을 무위無爲로 돌려내면서 행함이 없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세계를 소요하는 것이 , <꽃:맺음>이다. 시작도 끝도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태고의 우주가 피어나는 세계를 일화一花로 노래하고 있다. 우주탄생의 소리너머 소리를 그림으로 써낸 것이 김종건의 이고, <꽃:맺음>이다. 현이 있는 거문고 소리와 현이 없는 거문고 소리를 너머 현이 된 거문고 소리가 <꽃:맺음>이다. 그래서 귀로 그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것을 듣는다. 글자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