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AL ESSAY 02
김종건의 <꽃:맺음>을 보는 당신에게
- 이용제
계원예술대학 교수
#1. 당신은 왜, 여기 계시나요?
여기는 미술관입니다. 그중에서도 서예를 전시하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입니다.
문득, 당신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또 당신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서예가일까?
글씨(문자)를 좋아하는 사람일까?
새로운 미술을 찾는 사람일까?
작품 수집가일까?
문자향에 이끌려, 우연히 찾아온 사람일까?
언제부턴가, 서예는 대중과 멀어진 듯합니다. 우리는 점점 일상에서 글씨를 쓰지 않고, 글씨를 감상할 기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글씨를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무엇을 눈여겨봐야 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삼여의 <꽃:맺음>은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열리는 전시입니다. 이를 두고 누구는 서예 전시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림(회화) 전시라고 할 것입니다.
삼여는 제주살이를 시작하며, 스스로 문자와 회화의 경계에 섰습니다. 그는 붓 이외에도 다양한 도구로 글씨를 쓰고, 먹뿐만 아니라 물감으로도 문자와 자연을 표현합니다. <꽃:맺음>에서도, 여러 면에서 문자와 회화의 경계에 선 작업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업을 보편적인 ‘서書 예술’의 관점으로 논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서예가와 화가 모두에게 낯설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미술에 호의적이거나 그림 감상을 해온 사람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서 기대합니다. 이 낯섦이, 당신에게 확장된 문자 조형을 감상하는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씁니다.
#2. 작가, 삼여 김종건
서예가. 미술계에서 흔히 쓰는 말이며, 어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언가 애매합니다. 서예가는 과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예를 들면, 서예과나 어떤 스승 아래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뒤, 글씨를 쓰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깨쳤을지라도, 글씨를 예술(?)적으로 쓰는 사람일까요? 그 또한 아니라면, 그냥 글씨를 오랫동안 써온 사람일까요? 글씨 쓰는 데 있어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일까요? 어쩌면, 붓과 먹으로 글씨를 쓰는 모든 사람일까요? 누군가 자신을 스스로 서예가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서예가일까요?
삼여는 국내 첫 서예과에서, 훌륭한 여러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서예를 전공하며, 순수한 문자 조형에 깊이 빠져있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뒤, 서예의 고전적인 형식과 전통적인 양식의 틀 안에서만 글씨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예가’가 아닌, 디자인 분야에서 ‘캘리그라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 땅에 캘리그라피를 널리 알린 1세대입니다. 그리고, 서예가에게는 낯설었을 디자인과 디자인 방법론을 학습하여, 서예와 디자인을 결합하고,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에게 서예가라는 호칭보다 작가, 또는 좀 낯설지만, 문자 조형 예술가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이유입니다.
삼여는 늘 새로움을 좋아합니다. 20년 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2024년 삼여를, 5년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또 5년 후에, 삼여가 무엇을 시도하고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보면, 부정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세상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다가갑니다. 이때 그의 눈빛은 초롱초롱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을 빠르게 몸으로 흡수합니다. 그래서, 삼여가 앞으로 어떤 새로움을 찾아 나아갈까? 궁금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새로움에 대한, 그의 열린 마음은 함께 시간을 보내 본 사람은 압니다. 일상에서 정성스럽게 차를 우려내어주곤, 제주의 하늘을 보며, “너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삼여. 같은 생각일지라도 마음속에서 읊조리고 지나갈 연배이지만, 삼여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50살이 넘은, 서예가로 치면 이제 완숙의 단계에 들어가는 작가지만, 여전히 천진난만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여를 만나는 즐거움이며, 그의 작업이 늘 흥미로운 이유입니다.
#3. 살아있는 획의 확장
서예는 획에서 시작합니다. 이광사가 서결書訣에서 획을 ‘활물活物’이라고 했듯이, 서예에서 획은 시작이자 끝입니다. 획이 살아있지 않으면 글씨는 죽은 것과 같습니다. 서예가마다 살아있는 획에 대한 정의를 다르게 말할 수 있지만, 보통 살아 있는 획은 붓을 밀고 당기면서, 강약과 속도 등으로 인한 질감이 형성됩니다.
서예를 전공하며, 살아있는 획 긋기를 수련한 삼여는 캘리그라퍼로 활동하면서, 붓이라는 물성의 한계를 넘기 위해, 골판지, 나무, 담배꽁초 등 다양한 도구로 글씨를 썼습니다. 새로운 획을 만들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보낸 삼여는 이제, 붓으로 밀고 당김을 하지 않아도, 획에 강약과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선을 그려도 획이 됩니다.
선과 획의 차이는 명료합니다. 선은 시작과 끝이라는 정해진 규칙이 없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등, 어느 방향이든, 어디부터 어디까지든 상관없이 선을 그으며, 좋은(원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반면, 획은 정해진 위치로 이동합니다. 아무리 자유롭게 표현한다고 할지라도, 시작과 끝이 있고, 경로와 목적지가 분명합니다. 이를 벗어나면 더는 글자(문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여는 <꽃:맺음>에서 자신의 손을 도구로 삼았습니다. 삼여의 손이 붓이고, 손가락이 붓털입니다. 그동안 다양한 도구를 썼지만, 이제는 몸이 도구입니다. 이유는 너무나 간명합니다.
“붓으로는 원하는 획을 만들 수 없었다.”
삼여는 현무암에서 느낄 수 있는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먹이 아닌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고, 붓이 아닌 손으로 획을 만들었습니다. 용암이 흐르고 그 위에 또 용암이 덮이며, 바다 한가운데에 솟아 오른 제주의 현무암. 이 현무암을 표현하는 데 손과 아크릴 물감이, 더 적절한 도구였고 적합한 재료였습니다.
삼여는 손가락을 밀고 당기며 획을 만들었습니다. 사뭇, 낯선 획입니다. 붓으로 표현한 질감과 다릅니다. 한 걸음 다가가서 보면, 넓고 검은 면 속에 선이 보입니다. 손으로 문지르거나 비비지 않고, 한올 한올 붓털이 살아 움직여 결이 보입니다. 불현듯, 박서보의 곧은 선의 작품, 묘법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다릅니다. 삼여의 작품에서 보이는 결은 선이 아닌 획으로, 살아서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행서’를 쓸 때의 움직임이랄까. 느리지만, 주저 없이 흐르는 용암의 모습이랄까. 한 걸음 더 다가서서 획 끝자락을 보면, 용암이 흘러 바다를 만나며 맺어진 모습과 비슷합니다. 묘한 질감입니다. 삼여는 이를 의식하여, <꽃:맺음>에 의도적으로 담았을까요? 아니면, 자신이 제주가 된 것일까요?
만약, 당신이 지금 전시장에 있다면, 전시장에 낮게 흐르는 음악에 귀를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한라산 깊숙한 근원에서 출발한 여정이 중산간의 숲을 지나, 마을을 지납니다. 그 사이에 바람 소리와 새 소리, 낙숫물 소리와 아이들 소리 등 자연과 사람의 소리가 밀고 당기듯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다에 이릅니다. 삼여의 <꽃:맺음>을 너무도 아름답게 청각으로 옮겼습니다.
#4. 삼여의 빛
복잡한 도심 속 삼여와 제주 자연 속 삼여는 사뭇 다릅니다. 그중에서도 ‘빛’이 달라졌습니다. 서예에서 ‘먹의 빛’은 작품의 인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서예가마다 각기 좋아하는 먹빛이 있고, 작품마다 어울리는 먹빛을 찾습니다.
회색의 도심을 먹빛에 비유해 봅니다. 도심 속에 살던 삼여가 먹빛의 오묘한 차이를 작품에 반영했었다면, 제주 자연 속 삼여는 먹빛만으로 제주의 하늘과 바다와 산을 표현하는 데 갈증을 느낀 듯, 수년간 제주의 빛을 표현하기 적합한 재료를 찾아, 다채로운 색으로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문자와 제주를 표현했습니다.
삼여는 <꽃:맺음>에서, 빛에 대한 또 새로운 시도를 보여줍니다. 먹(단색)에서 물감(다색)으로, 그리고 다시, 다색에서 단색으로. 그러나 지금의 단색은 화선지와 먹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입니다. 캔버스가 백이고 아크릴 물감이 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는 보통의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이 아닙니다.
섬유질이 얼기설기한 화선지의 깊이와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빛의 깊이를 다루던 삼여는 캔버스에 단층을 쌓아 올려 깊이를 만들었고, 그 위에 중첩된 아크릴 물감은 또 다른 깊은 골과 낮은 골을 이루고 있습니다. 묘한 질감과 깊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아크릴 물감 특유의 반짝임이 없고, 은은한 먹빛이 난다는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화선지와 먹으로 단색의 깊이를 만들어 온, 삼여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빛입니다.
#5. 창작의 근원, 문자 한글
사람이 모여 살면서 문자가 발생했습니다. 오랜 시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도구와 재료로 문자를 쓰면서, 인간이 늘 그렇듯, 편리함과 새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작용하여, 새로운 문자 조형을 창출했습니다. 반면, 인위적으로 창제된 한글의 문자 조형은 조금 다릅니다. 새로운 문자 한글을 창제하면서 문자의 구조를 알기 쉽게 보여준, 설계도인 훈민정음체가 있습니다. 당시의 도구로 쓰기 힘든 모습이고, 당시의 보편적인 글씨 미감과도 상당히 다릅니다. 우리는 이를 고체 또는 판본체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양식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또한, 조선 시대 중기를 지나며, 한글 구조에 알맞은 쓰기 방식으로 진화한 궁체가 있습니다. 판본체(고체)와 궁체는 한글 문자 조형의 두 축입니다. 이외에 궁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체와 달리, 민간에서 형성된 글씨인 민체도 있습니다. 민체는 서툰 맛이 특징으로, 해학적입니다. 또한, 2000년 이후 캘리그라피가 성행하면서, 기존의 한글 조형 양식에서 벗어난 수많은 글씨체가 나왔고, 이들의 공통점은 낱말의 뜻(의미)을 그림처럼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서예를 전공한 삼여는 판본체, 궁체, 민체 등 한글 서체 양식을 모두 섭렵하고, 캘리그라퍼로 활동하던 30대 초반에 유려체를 발표했습니다. 기존의 양식이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보입니다. 그렇다면 <꽃:맺음>의 한글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 존재하는 서 예술의 관념으로는 평가하거나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삼여에게 문자 한글은 창작의 발원지이고, 추사의 말년 글씨에서 보이던 어린아이의 천진함이, 삼여의 한글에서도 보인다는 것입니다.
#6. 꽃:맺음
삼여는 그동안 수만 번의 꽃을 쓰고 그렸습니다. 문자로서의 꽃, 그림으로서의 꽃. 삼여가 꽃이라고 해도 더는 이상하지 않습니다. 삼여가 ‘꽃’ 한 글자에 집중하여 표현하는 것을, 스승인 해정 김세호는 문자의 회화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회화성은, 한글 초성, 중성, 종성을 점과 획으로 찍고 그은, 낱자(ㄲ, ㅗ, ㅊ)였고, 이 낱자를 모은 낱글자(꽃)였습니다. 소리와 형태를 일치시킨 한글입니다. 그러나, 한글 형태를 소리에 가두면, 벗어나기 힘든 한계가 있습니다. 초성 중성 종성에 해당하는 형태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글자(낱자) 자리마저 공고하여, 한글 조형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막습니다. 마치 순수한 상상을 막는 결계 같습니다.
삼여는 <꽃:맺음>에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 문자의 회화성을 보여줍니다. <돌>, <틈>, <숲> 등에서 우리 관념 속 글자 형태를 만들려는 의식을 없애고, 점과 선(획)—순수한 형태—을 캔버스에 놓았습니다. 마치 한글인 듯, 돌담인 듯, 숲인 듯…, 모호한 경계를 표현했습니다.
오래전 그래픽디자이너이자 한글디자이너인 안상수는 한글 낱자가 가로줄기(—), 세로줄기(|), 빗금(/), 동그라미(○)의 4가지 형태소로 이루어진, 원元형태라고 했습니다. 낱자가 한글의 으뜸 형태라는 말입니다. 필자는 안상수의 견해를 이어서, 가로줄기(—), 세로줄기(|), 빗금(/), 동그라미(○)가 한글의 원原형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점(동그라미)과 가로와 세로 등의 선이 한글의 근원이 되는 형태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삼여는 순수한 조형 단위인 점과 선(획)으로, 곧 한글의 원原형태로, 한글의 회화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문자라는 결계를 깨고, 한글의 회화성을 더 넓고 자유롭게 발현한 것입니다.
#7. 당신은 무엇을 보았나요?
서예 작품이 보였나요?
현대 미술 작품이 보였나요?
한글이 보였나요?
그림이 보였나요?
제주가 보였나요?
천진난만한 아이가 보였나요?
삼여의 <꽃:맺음>은 서양의 물성과 동양의 정신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어느 쪽에 속하기보다 늘, 경계에 서기 좋아하는, 늘 경계를 확장하려는 삼여의 성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삼여의 작업을 서예로 볼지, 그림으로 볼지 구분하기보다, 삼여가 놓은 서(한글)와 화(자연)를 감상하고 즐기면 됩니다.
삼여의 작품을 더 깊게 느낄 방법이 있습니다. 필자는 제주 애월 수산리 커피 맛집, 필묵에서 삼여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그의 작업을 시각과 촉각으로 보고, 제주 자연의 소리를 배경으로, 갓 내린 차와 커피가 제 후각과 미각을 자극했습니다. 삼여가 전시장에 시각과 촉각, 청각으로 꽃:내음을 옮겨 왔지만, 후각과 미각은 일상의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오감으로 온전히, 삼여의 작품을 감상할 수 없는 부분이 아쉽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저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가까운 미래에, 전시장에서도, 삼여의 작품을 오감으로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칩니다.